Pars Lucis



"의료는 잉여의 자리가 아니라 결핍의 자리에서 명예로워진다." - 본문 中


본문은 VOGUE지 2013년 4월호에 정형외과 의사 김현정씨가 쓰신 글이다.

개개인의 삶이 존재의 의미를 찾고 가치를 만드는 과정의 연속이라면, 그것은 그릇이기보다는 가치의 바른 전달을 위한 통로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특히 가치는 한 곳에 담는 것보다 가장 필요한 곳으로 나눌 수록 더 커진다는 의미에서 더욱 통로의 삶이 아름다워 보인다. 아래는 그런 삶에 대한 저자의 고민이 담긴 좋은 글이어서 스크랩을 해 왔다.



좋은 의사로 산다는 것


<의사는 수술하지 않는다>라는 책은 사회적인 반향이 컸다. 서울시의 의료정책 담당관이 ‘의료 미니멀리즘’이라는 나의 제안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지 자문을 구했고, 주변의 수많은 의사들이 ‘공감한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끝없이 불안을 조장해서 건강 염려증 환자를 만들어내는 의료과잉 사회에서 내가 제안한 건 과잉 수술과 처방을 막고 ‘의료 주체성’을 회복하자는 것. 병원 가서 몸 버리고 돈 버리지 말고 현명한 소비를 하자는 것.

 

세상엔 환자의 회복을 삶의 보람으로 느끼는 좋은 의사와 자신의 직업적 기득권 유지가 우선인 나쁜 의사들이 섞여 있다. 다행인 건 여전히 좋은 의사들이 더 많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의사가 해줘서 고맙다”고 한다. 미국에서 한 의사 선배는 환자 설문조사 결과를 알려주며 “닥터 김 책을 읽었으면 수술을 안 받았을 텐데…”라는 반응을 전해줬다. 수술과 처방만이 유일한 ‘출구’라는 맹목적인 믿음은 의료산업 사회가 만들어낸 신화다. 잉태와 출산과 질병과 노화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에서 점점 더 우리는 병원에 얽매인 ‘병원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원시인들은 의료가 없이도 지혜롭고 꿋꿋하게 생존했으며, 의료는 인간에게 점점 더 사치재로서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가랑비에 옷 젖든’ 의료 환경에 대한 그런 공감과 각성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변화를 일으키리라 믿는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의사란 어떤 존재인가를 끝없이 되물었다. 정형외과 의사지만, 의사로서 나는 정형화된 삶을 살지 않았다. 여자인 내가 정형외과를 지원한 것 자체가 모교인 연세대 의대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뼈를 맞추고, 관을 끼우고… 수술 도구 자체가 통나무를 내리칠 때 쓰는 커다란 망치와 뼈에 나사를 박는 드릴, 뼈를 자르는 전기톱이니, 오죽하면 정형외과 의사를 목수나 대장장이라고 불렀을까. 몇 번의 교수 회의가 열리고, “언젠가 여자 정형외과 의사가 필요하다면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해달라”는 나의 맹랑한 의지가 받아들여져 나는 세브란스가 배출한 최초의 여자 정형외과 의사, 대한민국 1호 여자 정형외과학 교수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레지던트 때를 생각하면 ‘학도병보다는 내 신세가 낫겠지’ 자위할 만큼 혹독한 시간이었다. 세수는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생리대 갈아 끼울 시간조차 없었던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의료 노동은 블루 컬러다. 청년의사들의 수련 기간은 길어지고, 꿈을 담보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사람들. 아픈 사람을 돕겠다는 초심의 불씨가 남은 의미 중심형 인간들이다.

 

다행인 건 내가 의사로서 진료실에만 앉아 있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했다는 것. 아프리카 케냐에서 의료활동을 했고, 북미 최고의 정형외과 병원인 미국 코넬 대학병원에서 3년간 의사로서 다양한 인종의 환자를 만났으며, 국내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교수 사회의 일면도 경험했다. 글로벌 제약회사에서 근무하는 동안엔 의료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그린 나의 미래가 노회한 의과대학 과장이나 VIP 환자만 받는 병원장이 아니었다는 데 안도한다.

 

한때 ‘의료는 필요 없다’라는 회의주의에 시달린 적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아파하다 죽는다는 엄정한 진리. 하지만 무엇을 하든 내가 의사라는 본업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의사는 언제 필요한가? 통증이 심하다면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 못 걷는 사람을 도와 걷게 만들고, 활동을 증진시켜줄 수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행복해진다. 나는 의사가 언제 왜 필요한가, 라는 질문을 통해 의업의 본질을 깨달아갔다. 의사들과 환자들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안타깝게도 의사들은 교육 과정에서 의심이나 질문, 인문적 사고가 허용되지 않는다. 토론도 설득도 없는 의사들의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화법’은 질문과 의심이 없었던 의대 교육의 부작용이다. 하지만 천년 전에도 그랬듯이 환자를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고통스러운 경험을 들어주고 상처를 감싸는 것이 의업의 기본이다.

 

환자와 의사는 진정한 대화를 나눠야 한다. 건강이란 무엇인가? 병이란 무엇인가? 내 몸의 주권은 어디 있는가? 나는 그 새로운 관점을 아유르베다에서 배웠다. 건강은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적당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다. 치료는 의사가 하지만 치유를 일으키는 것은 변함없이 우리 몸이다. 몇 년 전 일곱 살 남자 아이가 사고로 발목 뼈를 한 뭉텅이 잃었다가 7년 만에 자라난 경과를 학회에 임상 보고한 적도 있다. 내가 아는 관록 있는 의사들은 십자인대가 파열돼도 수술하지 않는다. 인공이 자연보다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 신체검사를 위한 가슴 사진 외에 X-ray도 잘 찍지 않는다. 30대에 콜로라도에서 산악 자전거를 타다 굴렀지만, 그때도 마찬가지. 오십견도 있고, 관절도 좋지 않지만, 운동으로 이겨내려 한다. 생명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자신의 몸을 치유하는 능력도 함께 지니고 태어난다. 몸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 아는 게 힘일 때도 있지만,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다.

 

아보 도오루 교수는 <몸의 혁명>에서 CT나 MRI로 암세포를 너무 일찍 발견해서 화학 치료를 하면 주변 세포조차 저항력을 잃어 암 발병률이 더 높아진다고 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고, 검진해서 이상 안 나오는 사람 없다. 전 국민이 ‘수업 시간에 들은 병의 증세가 마치 내 것같이 느껴진다’는 의과대학생증후군을 앓는 요즘, 새로운 치료법이 등장하는 것보다 더 빨리 새로운 질병이 등장한다. 불안은 우리 주변에 전염병처럼 만연해 있다.

 

결국은 병을 담백하게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이 치료의 시작이다. 몸의 균형이 깨지는 게 병이고,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찾는 게 ‘치료’다. 0차 진료라고 불리는 이 자발적 행위는 건강한 식단, 운동, 휴식,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 등이다. 내 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의사가 해줄 수 있는 것보다 많다는 진정한 주체로서의 자각, 그래야 기름진 음식을 먹고 콜레스테롤 약을 처방해달라고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수술이든 약이든 제때 제대로 쓰지 않으면 모두 독이다. 의료는 좀더 미니멀해져야 한다. 의사는 치유자가 아니라 치료자일 뿐.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할 때 세르파 같은 존재다. 많은 사람들은 묻는다. 병원 안가면 의사가 망하는 것 아니냐고.

 

의사는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한다. 경험 많은 의사는 세르파의 지혜로 환자에게 맞는 A, B, C, D 중 맞는 코스를 권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같이 가주는 거다. 지금의 의료계 질서로는 불가능할 것 같지만, 머지않아 창의적이고 새로운 세르파 역할을 해주는 의사들이 등장할 거라고 믿는다. 의료 시스템도 서서히 바뀔 것이다. 환자를 많이 볼수록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약을 적게 쓰고 혈압을 떨어뜨리거나, 수술을 하지 않고 병을 고치는 시스템에 혜택을 주는 쪽으로. 현대 사회는 의사와 환자 사이의 의료 정보 갭이 크지 않다. 이제는 내 몸을 주제로 다이얼로그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냥 수술, 그냥 약이 아니라 내가 어떤 도움을 받아들이고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의학 신기술이나 신약 뉴스는 일종의 트렌드다. 의사도 새로운 의료 기계로 군비 경쟁에 뛰어드는 걸 자제해야 할 뿐만 아니라 환자도 획기적인 신기술에 제 몸을 맡기는 모험심을 발휘할 필요가 없다. 의료에 있어서는 오래된 게 좋은 것이며,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가 낫다.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 냉동 기술이 냉동 인간이라는 상상력까지 만들어냈을 때, 불로장생이 무슨 의미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120년 후에 얼었다가 깨어난다 해도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사라진 그 삶이 과연 행복할까?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의 소중함에 집중할 수 있다. 순교자 같은 의미 있는 죽음도 있고, 아침까지 지붕 고치다가 한낮에 의자에서 조용히 죽는 노인으로서의 이상적인 죽음도 있으며, 9.11처럼 예상치 못한 사고로 죽는 경우도 있다. 언제라도 “마음 껏 웃고 사랑하다 간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현재의 행복을 미루지 말아야 한다.

 

의사로서 나는 부유하지 않다. 존슨앤존슨 아시아 태평양 총괄 디렉터를 거쳐 지금 내 일터인 시립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병원 관계자가 의아해했다. “압구정동을 택하지 않고 시립병원을 택하다니, 특이하시네요” 압구정행 버스는 수술을 권하는 광고판을 달고 달린다. 하지만 성형외과와 피부과가 몰려 있는 압구정동 의사들도 ‘소명 의식’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의사들이 내게 꼭 묻는 질문이 있다. “돈 안 받고 진료하고 싶어. 의료봉사 하고 싶은데, 네가 좀 알아봐줘.” 전통적으로 의료는 잉여의 자리가 아니라 결핍의 자리에서 명예로워진다.

 

앞으로 내가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가를 생각해본다. 나는 의사로서 부유한 생활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몇 년 전까지 살 곳이 마땅찮아 지방 병원 관사에서 지냈고, 지금도 서울 변두리 작은 아파트에서 남편과 소박하게 지낸다. <의사는 수술 받지 않는다>라는 책을 탈고하고도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아 출판도 내가 직접 했다. 정형외과 의사지만, 정형화된 인생은 재미 없지 않은가. 진부하지만, 그럼에도 의사가 가장 가슴이 뛸 때는 한 생명을 살리고, 그 생명이 내 손을 붙잡고 있을 때다.

 

몇 년 전 제약회사의 임원 자격으로 출장 가던 중에, 비행기 안에서 의사를 찾는 방송을 들었다. 연달아 방송이 이어지는 것을 보아 기내에 내가 유일한 의사였던 모양이다. 복도에는 한 중년 여성이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 있었다. 눕히고 혈압을 재고 급히 응급조치를 하자, 잠시 후 그 여성이 안색을 회복하고 깨어나서 내 손을 잡았다. 그녀가 내 눈만 애타게 바라보다 말했다. “선생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사가 원하는 최고의 순간은 환자와의 그런 깊은 ‘교감의 순간’이다.

 

여전히 하루에도 몇 차례 진료실에는 “진단서만 써주세요” “약만 타가면 돼요” 하는 메마른 대화가 이어진다. 그러나 여전히 진심이 오가는 진료실을 꿈꾼다. “얼마나 아프셨어요?”라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환자의 고통이 줄어들고, 한 장의 처방전보다 ‘운동과 섭생’에 관한 심도 깊은 대화가 있는. 내 결론은 이렇다. 행복한 의사가 행복한 환자를 만들어내고 행복한 환자가 질병을 이겨낸다. 그게 의료 미니멀리즘이다.

Posted by JisuPark Trackback 0 Commen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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